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리폴리 전투 (문단 편집) === 상륙작전의 시작 === 그 6주간의 시간 동안, 무스타파 케말 대령의 오스만 육군은 보충병들을 받아들여 다시 한 번 전투력을 회복한 뒤였다. 이때 추가로 충원된 오스만군 병력이 10만. 요새포와 해안포도 다시 재구축했기에 앞서 한 공격은 완전히 헛짓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와중에 케말 대령은 장병들을 모아두고 연설을 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필사즉생행생즉사|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싸워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그리고 상륙작전은 뒤늦게 다시 강행된다. 그런데 [[영국 육군]]과 [[영국 해병대]]는 해안에 첫 발을 디딘 뒤에야 이 지역이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임을 깨닫게 된다. 해안의 폭이 워낙 좁아 상륙한 영국군은 그 자리에 못박힌 채 고지대에 위치한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에 맞는 지경이었음에도 영국군은 당초 계획대로 병력을 차분히 그 속으로 밀어넣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너무나도 얕잡아봤는데, 특히 오스만군의 화기를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 육군이 [[저격수]]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저격수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 육군은 [[게베어 1898#s-3.8|7.92mm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저격수 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시골에서 어릴 적부터 총으로 늑대나 온갖 동물을 사냥해 사격 솜씨가 출중했는데, 결국 이들 저격수 부대에게 영연방군은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저격수 부대로 맞섰다. 하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당하고 적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수세에 몰리던 와중 결국 수뇌부에서 내놓은 작전이 [[야포]]들을 이용한 포격으로 화망을 형성해서 오스만군을 참호에서 교착시키고 그때 그나마 좀 상태가 멀쩡한 오스트레일리아 보병 사단이 일제히 고지로 돌격해 참호를 뺏고 전진한다는 아주 지극히 간단해보이는 작전이었다. 의도는 좋았고 성공 가능성도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막상 작전 개시 당일에 하필 '''야포를 지휘한 사령관과 보병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시계가 일치하지 않았다.''' 해군의 함포 사격은 애저녁에 끝나버렸고, 함포의 화망을 바탕으로 돌격했어야 할 육군이 튀어나왔을 때에는 이미 해군의 엄호사격은 다 끝난 뒤였다. 만일 여기서 다시 야포 사격을 하고 보병대가 돌격했으면 될 수도 있었으나 외부의 전황을 모르는 최고사령부는 그냥 씹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은 몇 m도 달리지 못하고 기관총의 화망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파일:갈리폴리2.jpg]] 오스만군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는 '호주-뉴질랜드' 군단(ANZAC) 결국 단 하루만에 오스트레일리아 사단 중 8천 명이 [[무인지대]]의 백골이 되었고 1만 8천 명은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게 밑에 서술한 호주 영화 갈리폴리의 배경이 된다.][* 그나마 보병대 쪽 시계가 좀 늦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보병대 쪽 시계가 더 빨랐으면 포병대의 포탄에 팀킬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상륙지점에서 단 1마일도 전진하지 못하고 해안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거기다 보급을 두 세계대전 동안 다 책임진 [[미국]]이 참전하기 2년 전이라 보급이 정상일 리 만무했고, 물조차도 현지에서 구하지 못해 멀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실어오는 물탱크에 의지해야 했는데다, 위의 [[다르다넬스 해전]]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기뢰밭이기도 해서, 제때 보급되는 물자가 없다시피 하였다. 즉 정상적인 보급도 안되는 마당에 그 보급 중 상당량을 식수에 할당해야 했다는 거다. 그 자리만큼 총탄 보급량은 줄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영국군은 병력을 끊임없이 [[축차투입]], 박살이 나는 수순을 무한 반복했다. 전투가 중반을 넘어서자, 오히려 오스만군이 요새와 참호에서 튀어나와 연합군을 해안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해안가에 상륙시킨 협상국 병력이 몰살당할 뻔한 상황까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육군 57연대는 총알도 포탄도 모두 바닥이 났지만 그들 모두는 '''"오늘 우린 죽기 위하여 싸운다!"'''를 외치며 착검 돌격을 가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론 이들은 착검 돌격 전에는 정말로 돌을 내던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이때 북마케도니아 출신 [[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Hüseyin Avni Bey, 1874 ~ 1915)가 [[장검]]을 쳐들고 맨 먼저 달려나갔고, 연합군의 총격에 그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부연대장이 연대장의 장검을 쳐들고 진격했다. 대장부터 이렇게 [[솔선수범]]을 보이니 사기가 오른 연대원들도 착검 돌격해 결국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 집념 어린 착검 돌격에 연합군의 피해도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육상 돌격을 머뭇거리게 된다. 사실 연합군이 병력 피해를 감안하고 묻지마 돌격을 했더라면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오스만군은 당시 총알 부족 및 여러 문제에 빠졌지만 연합군들이 신중을 기하느라(물론 이들도 위에 열거한 여러 사정과 문제도 있었지만) 오스만군은 병기와 탄약을 추가 보급받을 시간을 얻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Hussein_Avni_Bey.jpg]] 오스만 제국 육군 57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 그 덕분에 나중에 아타튀르크는 이 57연대 전원의 용기 어린 활약으로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리면서 연대장의 이름을 딴 훈장을 제정하고 이 연대를 명예 부대로 헌사했다. 하지만 부대를 재건하지 않고 영원한 명예 부대로만 남겨뒀다.[* 현재 튀르키예 겔리볼루에 가면 57연대를 기리는 기념비와 그들의 무덤이 있다. 아타튀르크는 진정한 조국의 영웅이라면서 살아생전 자주 왔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 결국 지지부진한 소모전 끝에 연합군 사령관 이언 스탠디시 몬테이스 해밀턴(Ian Standish Monteith Hamilton, 1853 ~ 1947)이 해임되었고, 후임 찰스 카마이클 먼로(Charles Carmichael Monro, 1860 ~ 1929) 장군은 이듬해인 1916년 1월 작전 실패를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해야 했다. 8개월 넘게 끈 이 전투로 연합군은 총병력 57만 가운데 25만 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했고, 오스만군 또한 32만 명의 병력 중 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